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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때 부케를 던지고 받는행사는 언제부터&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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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케의 시작은 기원전 3000년..
옛날 유럽에서는 남성이 프로포즈를 할 때 야생화를 꺽어서 만든 꽃다발로 사랑하는 여성에게 선물했습니다.
여성은 결혼 승낙의 표시로서 부케 중에서 한송이를 살짝 남성의 가슴에 꽂았습니다.
이것이 웨딩부케와 부토니아의 시작!! 로맨틱한 유럽인의 관습입니다. 프로포즈에서 빠질수 없는 부케에는 "나쁜 것으로부터 신부를 보호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부의 소망을 담은 부케.. 이 부케는 언제 탄생했을까요?? 꽃으로 마음을 전하는 관습은 아주아주 옛날.. 인간이 겨우 두 개의 다리로 걷기 시작했던 네안데르탈인이였을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이란의 자크로스 산맥에서 발견된 유골 옆에 국화, 백합, 접시꽃 등의 화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죽은 친구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대를 옮겨서 기원전 3000년 거대한 왕조사회를 만들었던 고대 이집트는 권력의 상징으로서 부케가 사용되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파피루스, 부들, 야자, 강아지풀 등을 라피아로 묶은 부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케의 시작이라고 생각됩니다. 피라미드 벽화에는 연꽃, 창포, 양귀비, 아이리스, 백합 등의 꽃이 그려져 있었고, 투탕카멘의 관 안에는 수레국화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연꽃은 성스러운 꽃으로 숭상되었다고 합니다.
하얀 백합은 성모마리아, 튜울립은 기원을..
그 뒤 꽃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었고 기원후 1200년 이후의 고딕시대가 되자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보급으로 꽃은 전부 종교적인 사상에 기초해서 생각되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얀 백합은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꽃으로 정절과 번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튜울립은 기원, 올리브는 평화 등..
명화 "수태고지(受胎告知)"에 하얀 백합을 사용한 것도 종교적인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는 냄새 제거용으로 사용된 부케
그리고 18세기 마리앙트와네트의 시대. 유럽에서는 물부족이 계속되어 비위생적인 환경에 의해서 거리에는 페스트가 유행했고 악취가 자욱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작은 병에 향기가 있는 꽃을 넣어서 몸에 소지했습니다. 상류사회에서는 냄새제거(코 주변에 부케를 가지고 악취를 제거했다)가 유행해서 이 무렵 향이 강한 꽃이 장식되게 되었습니다. 장소를 바꾸어서 영국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입니다. 영국에서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비위생적이었기 때문에 꽃은 악취를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사랑하는 남편 알버트공의 사후 평생 사복을 입고 검은색과 짙은 회색 등의 짙은 색을 몸에 걸쳤습니다. 그 때문에 부케는 색이 짙은 붉은색, 붉은기가 있는 자주색, 겨자색, 로열블루, 브라운 등의 짙은 색의 꽃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웨딩부케는 전후부터..
일본의 웨딩부케의 시작은 전후부터입니다. 1965년부터 결혼식의 서양화와 함께 생화부케를 들게 되었습니다. 또 신부가 결혼식을 한 뒤에 부케를 던지는 부케 토스. 이것은 고대 로마에서 시작된 것으로 횃불을 참석자를 향해서 던지고 받은 사람이 그 횃불로 신혼집에 맨 처음 불을 붙인다는 관습의 흔적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횃불은 꽃으로 변했고 "꽃을 받은 여성이 다음에 결혼한다."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부케는 사회와 역사의 변화에 의해서 계속 변화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꽃으로 마음을 전한다."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부케에 사랑과 희망이라는 마음을 담고 싶습니다.
한국의 웨딩부케
한국에서 결혼식을 할때 서양풍의 꽃을 사용하기 시작한것은 1890년경 부터이지만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것은 30년 전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웨딩부케에 그치지 않고 꽃길, 야외 촬영용 부케, 과일꽃바구니, 웨딩카 장식등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과 함께 새로운 분야가 계속해서 개척되고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이처럼 꽃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결혼식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경사스런 대사(大事)이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추억에 남는 결혼식을 올리려는 바램에서 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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